⟪대리석을 핥는 장미⟫ 전시 서문, 우석갤러리, 2024
그다음은 꽃들의 차례였다.
…
장미는 그들의 꺼지지 않은 불꽃 같은 입,
육신의 화염으로 변치 않는 대리석 위를 핥으며
와인 같은 붉은 얼룩과 핏빛의 자주색 얼룩을
길고 순수한 기둥 꼭대기까지 튀겼다.
(Le Mortis, Contes et Nouvelles (1900)/ Rachilde)
역사, 이성, 도시를 침략해오는 맹렬한 불꽃. 죽음을 암시하는 한여름의 열화상을 그리는 관능적인 상징들의 나열, 라실드의 문장들은 전체를 이루는 감각의 심포니로서 기능한다. 낡은 것을 죽음으로 여기고 오직 새로운 발견으로 예술을 탐하기, 포섭되지 않은 언어(hapax)와 관습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하는 방식을 고집했던 19세기 말의 퇴폐 예술 사조 데카당스(Décadence)는 완성과 절정에 도달한 문화의 나른한 아름다움으로 일컬어진다.
‘Rachilde’라는 필명으로 성적으로 와해된, 온갖 스캔들적인 작품들을 쏟아낸 작가 Maguerite Eymery (1860-1953). 희귀한 것들에 민감하고 편집증적이며 온갖 유혹, 불안을 다루는 데카당스 문학 기류와 다의성, 종합의 미학인 상징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시 문학, 희곡, 소설 장르를 혼합시킨 극-산문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라실드의 텍스트는 모든 것을 표현하도록 촉구된 듯이 극도로 과장되어 있고 생명성과 죽음의 경계, 성적 구분1이 모호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대리석을 핥는 장미⟫는 비좁은 공간 안에 둘 이상의 상징이 어지럽게 뒤얽혀 추는 춤, 동시에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종말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의 표상이다. 접합할 수 없는 시간의 거리에서 다시금 이 매혹적인 말의 놀이(jeux d’écriture)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불멸의 합리성과 이성의 표면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더럽히는 우리들만의 은밀한 놀이이며, 어쩌면 지금에 있어 유일한 대항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추는 자들과 알려고 하는 자들의 숨바꼭질
숨바꼭질 같은 상징과 재현의 무대에서 불리한 쪽은 언제나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아)보려는 자, 우리다.
전시라는 사건(scene)에서 진실의 키를 쥐고 있는 영현과 정민의 작업은 매체의 휘장 사이를 오가며 결코 자신을 전부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듯하다. 영현의 캔버스는 단단한 프레임을 벗고 하나의 막/망처럼 걸려있고, 이들이 드리운 이미지는 두껍고 단단한 사전에서 찢겨 나온 종잇장에 남겨진 아리송한 단어와 상징들의 단편 같다. 이처럼 작가는 상징, 허구, 상상, 재현을 뒤섞고 혼합하는 방식으로 미끄러지거나 찢겨 나온 욕망을 가시화한다.
정민의 손을 거친 유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신비한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거칠게 풍화되어 있거나 때로는 묵직하고, 속을 감추는 희뿌연 표면을 띠는 등 유약하고 투명한 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있다. 이 유리 조각들은 먼발치에서 오류를 범하는 시각 체계를 자극하고는 지켜보고, 희롱하면서 본질을 숨긴 채 각자 연극 속 역할을 연기한다. 정민은 그럼으로써 하나의 가시성이 의미를 획득하는 세계의 작동 방식에 의문을 부치고 추상과 장식, 빈 공간(void)과 조각의 관계성이 빚어내는 경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가 지닌 전복성을 실험한다.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감추거나 속이는 일은 분명 정치적이다. 속이기는 권력의 이동과 유지, 쟁탈이 이루어지는 전투의 장이고 때론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도 환영적인 결핍과 욕망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반복적이고 수렴적인 내적 논리를 띤다. 무엇보다 거짓의 극(drama)적 전략은 쾌락을 동반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쪽이나 그 작동을 파헤치려는 쪽은 모두 진리의 선취라는 목적 아래 신기루 같은 쾌감을 느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비어있는 실재를 지시하고 은유(대체)하려는 무한한 시도와 실패를 담지한 언어, 재현의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시각장 안에서 이러한 거짓의 플레이는 무엇보다도 예상을 무너뜨리려는 충동적이고 전복적인 의지와 관련되며, 속이기는 또한 제 3의 위태로운 존재 방식을 탐색하는 일, 의미의 제공과 교환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유보적인 태도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끝없는 실랑이 속 우리가 패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술래의 역할을 져버리는 것뿐이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것 자체에 감응하며 함께 숨죽이기. 속이고 속아 넘어갈 때의 ‘나’는 ‘눈먼 나’이며, 이때 주체는 해방적 상상력을 잠시 엿본다.
어두운 한 낮의 꿈 A daydream in the dark
낭만주의 소설 <푸른 꽃>2에서 경계적인 시공간 어스름 녘은 ‘낮의 빛과 밤의 어둠이 부딪히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때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만 목격할 수 있는 속임수가 존재’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영현의 화폭은 이처럼 빛과 어둠, 죽음과 생명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경계 공간(liminal space)으로 설정되었다. 작가의 회화에서 실제 정물 혹은 풍경으로 보이는 도상들, 예컨대 말, 깃털, 숲, 구름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를 둔 상상의 재구성, 즉 관념적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깃털’들은 실제 물성을 지닌다기보다 어떤 완전한 이데아적인 깃털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작가가 조작을 가해 왜곡된 빛과 밀도, 물체의 전도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표현한 회화는 무의식의 탐구, 추상화(abstraction)를 거친 파편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작가는 전작에서 생과 사, 인간과 천상의 중간자인 ‘천사’와 역사적으로 힘, 자긍심, 아름다움을 함의하는 도상인 ‘말’ 등 구체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선과 악의 알레고리, 자연의 숭고화를 비롯해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서사를 떠받치기 위해 사용해 온 프레임의 오래된 관습을 흉내 내고(mimic), 폭로하면서 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령같이 희미한 형체를 띤 몸들과 그 사이에서 비쭉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가시, 붉은 육체들 또한 욕망의 자연화와 저속함의 얄팍한 경계를 말한다. 이들이 과감하게 차지하는 화면 구성에 더해 초감각적인 확대, 비약과 의뭉스러운 상징들은 인상주의를 넘어 추상에 가닿았던 ‘나비파(Les Nabis)’의 미묘한 색채를 닮은, 섬세하고 미끈한 수채화로 제시되면서 감각의 착란을 가중한다. 작가는 이처럼 비어있는 회화적 기호의 허상을 폭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무한히 유보하면서, 실재와 재현, 믿음과 허구가 공존하는 상징적 체제 안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Entre-deux ; between two (things)
감각의 비논리적 충돌은 또한 단단함과 유약함, 작고 정밀한 터치와 구조적인 지지물이 함께 제시되는 정민의 혼성 조각을 이끄는 주된 작동 원리다. 유리는 그 자체로 작은 모래 입자에서 화력과 기술, 노동력을 거쳐 변모하는 다양한 시간화와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정민이 유리를 다루는 방식은 물질에 내재하는 복합적인 성격과 모순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분절시키면서, 스스로 무한히 중첩되거나 독립적인 구조를 이루는 하나의 형식적 유희, 즉 미장아빔(mise en abyme)으로서 존재케 하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한편, 작가는 유리 작업에서 주로 선택되는 블로잉 기법에 비해 재료, 시간과 같은 물리적 조건의 절대적인 투입을 요하는 캐스팅 방식을 활용한다. 틀에 천천히 굳힌 유리는 자연스럽게 불투명한 표면을 지니는데, 이 표면을 연마하는 수공예적 노동의 정도에 따라 그 투명도를 달리하게 된다. 유리는 크리스털의 경우에서와 같이 매끈함이나 투명도가 가치의 지표가 되어왔기 때문에, 연마 기술은 미술에서 유리가 공예 재료로서 격하되거나 제한되어온 맥락을 포함하고, 그 구분과 위계의 경계를 와해시키고자 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도구이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체의 대립적 구조를 해체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은 정민의 조각이 지닌 여타 속성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Cheeeeeeesze>(2021), <you cannot trust a surface>(2023)와 같은 작업은 유리 오브제와 좌대 혹은 지지대가 전체 구조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전시 방식에 따라 결합되거나 부분적으로 제시되면서 어떤 대표성이나 중요도에 있어 위계 없이 존재한다. 하나의 유기물을 구성하는 신체 기관들이 결속되었다가 풀어지고, 제 방식대로 다시 붙고 치환되듯이 혼돈하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병치되는 것이다.
데카당스의 근간인 부정의 동력과 모호한 언어, 문법 규칙을 어지럽히고 다의적 상징을 종합하는 글쓰기 방식을 떠올려보자. 정민의 유리 조각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들의 글쓰기 놀이처럼 구조는 부분으로, 부분은 물질의 독립성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리보충 — 오직 그 자신의 부정으로서만 보이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1 명사에 있어 여성성, 남성성을 부여하는 언어에서 문법적 성은 지칭 대상의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던 상징주의 문학에서 활발히 사용되었으며, 특히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문학 텍스트를 낱말의 성을 통해 분석하는 성 분석(génosanalyse)은 보편적인 방법이다. 한편,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강조했듯이, 거의 모든 언어학자들은 구체적인 낱말들에 성을 배분하는 규칙이 순전히 우연적이고 관례적이라는데 동의한다.
2 노발리스, <푸른 꽃>,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3
김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