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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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피어오르는 연기,
날카로운 깃털,
가시 돋친 매끈한 나무,
날지 않는 천사들.
어제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 그 어떤 것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온 날이 있다. 언젠가부터 지나치게 평화 로운 것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모를 위태로움이 느껴지곤 했다. 이제껏 자연스레 상상했던 장면들이 실은 무 의식중에 학습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러한 예민함은 나의 작업 전반에 흐르는 일관된 감각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 한순간에 뒤바뀔 때에 위반의 매력을 느낀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굳어진 것에 가느다란 금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금은 은연중에 불안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깨져버린 화병이 아닌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금이 간 화병처럼 위태로운 가능성을 머금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고자 한다. 위반과 모순의 알레고리로서 나는 자주 ‘천사’나 ‘말’과 같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강한 재료들을 빌려왔다. 그들의 껍데기는 내 허구의 세상에서 정해진 레시피 없이 빚어진다. 예컨대 천사는 ‘선’의 상징으로 흔히 인간의 형상에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그 날개가 그들을 인간의 잣대에서 벗어나게 하기도 갇히게 만들기도 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점은 내가 상징의 소재를 가져와 흉내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런 유희들이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물과 호분(조개껍질 가루로 만든 전통안료)을 사용해 물감의 농도와 채도를 조절하여 얇은 광목천에 부드럽게 스미는 기법은 아무리 여러 번 겹쳐 올려도 그 두께가 유지된다. 그렇게 만든 안정감있는 환영은 때때로 구겨지고 흘러내리고 그러다 실오라기기와 함께 해체되며 보잘것 없는 천의 연약함에 무너진다. 어쩌면 그러한 물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한껏 몰입시켜 놓은 평평한 환상에 위태로운 입체감을 보태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그림들에선 더욱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부단히 존재하게 한다. 본 적 없는 것을 본 것처럼 그려내거나 사물의 본래의 속성에 반하게 표현하는 모순적인 행위에서 나는 창조자의 놀음과도 같은 쾌감을 느낀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공간 속에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대상을 묘사하며, 관념적인 표현과 현실적인 표현이 한데 뒤섞으니 점점 더 묘한 기시감이 생긴다. 미시감과 기시감의 사이, 쾌와 불쾌의 사이, 낭만과 공포의 사이.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그러니 오히려 누구보다 가까운, 그러나 한 끗 차이로 갈라져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그 간극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내가 만든 세계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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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
Artist’s Statement, 2024
✥Heavy smoke rising slowly,
sharp feathers,
smooth yet thorn-covered trees,
angels that do not fly.
There are days when something I once found beautiful suddenly strikes me with an overwhelming sense of dread. At some point, I began to feel an unsettling tension in images that appeared excessively peaceful. I have experienced moments of realizing that the scenes I had naturally imagined were, in fact, unconsciously learned. These realizations deeply affected me, and this heightened sensitivity has become a consistent undercurrent in my work.
I am drawn to the allure of transgression when something long regarded as romantic and beautiful is abruptly inverted. This is why I seek to create subtle fractures in the things that have become tacitly accepted and solidified over time. A crack, however fine, carries with it an unspoken anxiety. Rather than depicting a vase that has already shattered, I aim to capture the fragile beauty of a vase on the verge of breaking—holding within it a precarious possibility.
As allegories of transgression and contradiction, I often borrow imagery with strong symbolic associations, such as angels or horses. Stripped of their original context, these figures are reshaped in my fictional world without a predetermined formula. For instance, angels have long been depicted as symbols of virtue—humanoid figures adorned with wings. Yet, those very wings both liberate them from human constraints and simultaneously confine them. The contradiction of wings symbolizing "freedom" while failing to be truly "free" is precisely why I engage with symbolic motifs, imitating them while questioning their inherent meanings.
At the same time, I am careful to remind myself and the viewer that these representations are mere illusions—that this world I construct does not truly exist. Using water and hobun (a traditional white pigment made from crushed seashells), I control the density and saturation of the paint, allowing delicate layers to softly seep into thin muslin fabric. No matter how many times the pigment is overlaid, the material retains its translucency, creating an illusion of stability. Yet, over time, these carefully constructed images wrinkle, sag, and unravel, dissolving into fragile threads—collapsing under the weight of the fabric’s own vulnerability. Perhaps revealing this materiality in its entirety adds a precarious dimensionality to the otherwise immersive flat illusion.
In my recent works, I am even more invested in persistently making the impossible exist. I attempt to paint things I have never seen as if I have seen them or depict objects in direct opposition to their inherent nature. This paradoxical act grants me a sense of creative play, akin to that of a maker toying with their creation. Situated in a timeless space—neither past nor future—I observe my subjects at the closest possible range, blurring the boundaries between conceptual and realistic representation. As a result, a peculiar sense of déjà vu intensifies.
Between the familiar and the unfamiliar, between pleasure and discomfort, between romance and fear—these opposing forces seem to lean against each other, simultaneously the closest of kin and yet separated by the thinnest of boundaries. I remain attuned to these subtle gaps, obsessively observing the world I have created.
그다음은 꽃들의 차례였다.
…
장미는 그들의 꺼지지 않은 불꽃 같은 입,
육신의 화염으로 변치 않는 대리석 위를 핥으며
와인 같은 붉은 얼룩과 핏빛의 자주색 얼룩을
길고 순수한 기둥 꼭대기까지 튀겼다.
(Le Mortis, Contes et Nouvelles (1900)/ Rachilde)
역사, 이성, 도시를 침략해오는 맹렬한 불꽃. 죽음을 암시하는 한여름의 열화상을 그리는 관능적인 상징들의 나열, 라실드의 문장들은 전체를 이루는 감각의 심포니로서 기능한다. 낡은 것을 죽음으로 여기고 오직 새로운 발견으로 예술을 탐하기, 포섭되지 않은 언어(hapax)와 관습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하는 방식을 고집했던 19세기 말의 퇴폐 예술 사조 데카당스(Décadence)는 완성과 절정에 도달한 문화의 나른한 아름다움으로 일컬어진다.
‘Rachilde’라는 필명으로 성적으로 와해된, 온갖 스캔들적인 작품들을 쏟아낸 작가 Maguerite Eymery (1860-1953). 희귀한 것들에 민감하고 편집증적이며 온갖 유혹, 불안을 다루는 데카당스 문학 기류와 다의성, 종합의 미학인 상징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시 문학, 희곡, 소설 장르를 혼합시킨 극-산문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라실드의 텍스트는 모든 것을 표현하도록 촉구된 듯이 극도로 과장되어 있고 생명성과 죽음의 경계, 성적 구분1이 모호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대리석을 핥는 장미⟫는 비좁은 공간 안에 둘 이상의 상징이 어지럽게 뒤얽혀 추는 춤, 동시에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종말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의 표상이다. 접합할 수 없는 시간의 거리에서 다시금 이 매혹적인 말의 놀이(jeux d’écriture)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불멸의 합리성과 이성의 표면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더럽히는 우리들만의 은밀한 놀이이며, 어쩌면 지금에 있어 유일한 대항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추는 자들과 알려고 하는 자들의 숨바꼭질
숨바꼭질 같은 상징과 재현의 무대에서 불리한 쪽은 언제나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아)보려는 자, 우리다.
전시라는 사건(scene)에서 진실의 키를 쥐고 있는 영현과 정민의 작업은 매체의 휘장 사이를 오가며 결코 자신을 전부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듯하다. 영현의 캔버스는 단단한 프레임을 벗고 하나의 막/망처럼 걸려있고, 이들이 드리운 이미지는 두껍고 단단한 사전에서 찢겨 나온 종잇장에 남겨진 아리송한 단어와 상징들의 단편 같다. 이처럼 작가는 상징, 허구, 상상, 재현을 뒤섞고 혼합하는 방식으로 미끄러지거나 찢겨 나온 욕망을 가시화한다.
정민의 손을 거친 유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신비한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거칠게 풍화되어 있거나 때로는 묵직하고, 속을 감추는 희뿌연 표면을 띠는 등 유약하고 투명한 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있다. 이 유리 조각들은 먼발치에서 오류를 범하는 시각 체계를 자극하고는 지켜보고, 희롱하면서 본질을 숨긴 채 각자 연극 속 역할을 연기한다. 정민은 그럼으로써 하나의 가시성이 의미를 획득하는 세계의 작동 방식에 의문을 부치고 추상과 장식, 빈 공간(void)과 조각의 관계성이 빚어내는 경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가 지닌 전복성을 실험한다.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감추거나 속이는 일은 분명 정치적이다. 속이기는 권력의 이동과 유지, 쟁탈이 이루어지는 전투의 장이고 때론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도 환영적인 결핍과 욕망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반복적이고 수렴적인 내적 논리를 띤다. 무엇보다 거짓의 극(drama)적 전략은 쾌락을 동반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쪽이나 그 작동을 파헤치려는 쪽은 모두 진리의 선취라는 목적 아래 신기루 같은 쾌감을 느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비어있는 실재를 지시하고 은유(대체)하려는 무한한 시도와 실패를 담지한 언어, 재현의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시각장 안에서 이러한 거짓의 플레이는 무엇보다도 예상을 무너뜨리려는 충동적이고 전복적인 의지와 관련되며, 속이기는 또한 제 3의 위태로운 존재 방식을 탐색하는 일, 의미의 제공과 교환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유보적인 태도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끝없는 실랑이 속 우리가 패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술래의 역할을 져버리는 것뿐이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것 자체에 감응하며 함께 숨죽이기. 속이고 속아 넘어갈 때의 ‘나’는 ‘눈먼 나’이며, 이때 주체는 해방적 상상력을 잠시 엿본다.
어두운 한 낮의 꿈 A daydream in the dark
낭만주의 소설 <푸른 꽃>2에서 경계적인 시공간 어스름 녘은 ‘낮의 빛과 밤의 어둠이 부딪히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때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만 목격할 수 있는 속임수가 존재’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영현의 화폭은 이처럼 빛과 어둠, 죽음과 생명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경계 공간(liminal space)으로 설정되었다. 작가의 회화에서 실제 정물 혹은 풍경으로 보이는 도상들, 예컨대 말, 깃털, 숲, 구름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를 둔 상상의 재구성, 즉 관념적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깃털’들은 실제 물성을 지닌다기보다 어떤 완전한 이데아적인 깃털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작가가 조작을 가해 왜곡된 빛과 밀도, 물체의 전도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표현한 회화는 무의식의 탐구, 추상화(abstraction)를 거친 파편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작가는 전작에서 생과 사, 인간과 천상의 중간자인 ‘천사’와 역사적으로 힘, 자긍심, 아름다움을 함의하는 도상인 ‘말’ 등 구체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선과 악의 알레고리, 자연의 숭고화를 비롯해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서사를 떠받치기 위해 사용해 온 프레임의 오래된 관습을 흉내 내고(mimic), 폭로하면서 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령같이 희미한 형체를 띤 몸들과 그 사이에서 비쭉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가시, 붉은 육체들 또한 욕망의 자연화와 저속함의 얄팍한 경계를 말한다. 이들이 과감하게 차지하는 화면 구성에 더해 초감각적인 확대, 비약과 의뭉스러운 상징들은 인상주의를 넘어 추상에 가닿았던 ‘나비파(Les Nabis)’의 미묘한 색채를 닮은, 섬세하고 미끈한 수채화로 제시되면서 감각의 착란을 가중한다. 작가는 이처럼 비어있는 회화적 기호의 허상을 폭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무한히 유보하면서, 실재와 재현, 믿음과 허구가 공존하는 상징적 체제 안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Entre-deux ; between two (things)
감각의 비논리적 충돌은 또한 단단함과 유약함, 작고 정밀한 터치와 구조적인 지지물이 함께 제시되는 정민의 혼성 조각을 이끄는 주된 작동 원리다. 유리는 그 자체로 작은 모래 입자에서 화력과 기술, 노동력을 거쳐 변모하는 다양한 시간화와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정민이 유리를 다루는 방식은 물질에 내재하는 복합적인 성격과 모순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분절시키면서, 스스로 무한히 중첩되거나 독립적인 구조를 이루는 하나의 형식적 유희, 즉 미장아빔(mise en abyme)으로서 존재케 하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한편, 작가는 유리 작업에서 주로 선택되는 블로잉 기법에 비해 재료, 시간과 같은 물리적 조건의 절대적인 투입을 요하는 캐스팅 방식을 활용한다. 틀에 천천히 굳힌 유리는 자연스럽게 불투명한 표면을 지니는데, 이 표면을 연마하는 수공예적 노동의 정도에 따라 그 투명도를 달리하게 된다. 유리는 크리스털의 경우에서와 같이 매끈함이나 투명도가 가치의 지표가 되어왔기 때문에, 연마 기술은 미술에서 유리가 공예 재료로서 격하되거나 제한되어온 맥락을 포함하고, 그 구분과 위계의 경계를 와해시키고자 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도구이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체의 대립적 구조를 해체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은 정민의 조각이 지닌 여타 속성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Cheeeeeeesze>(2021), <you cannot trust a surface>(2023)와 같은 작업은 유리 오브제와 좌대 혹은 지지대가 전체 구조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전시 방식에 따라 결합되거나 부분적으로 제시되면서 어떤 대표성이나 중요도에 있어 위계 없이 존재한다. 하나의 유기물을 구성하는 신체 기관들이 결속되었다가 풀어지고, 제 방식대로 다시 붙고 치환되듯이 혼돈하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병치되는 것이다.
데카당스의 근간인 부정의 동력과 모호한 언어, 문법 규칙을 어지럽히고 다의적 상징을 종합하는 글쓰기 방식을 떠올려보자. 정민의 유리 조각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들의 글쓰기 놀이처럼 구조는 부분으로, 부분은 물질의 독립성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리보충 — 오직 그 자신의 부정으로서만 보이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1 명사에 있어 여성성, 남성성을 부여하는 언어에서 문법적 성은 지칭 대상의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던 상징주의 문학에서 활발히 사용되었으며, 특히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문학 텍스트를 낱말의 성을 통해 분석하는 성 분석(génosanalyse)은 보편적인 방법이다. 한편,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강조했듯이, 거의 모든 언어학자들은 구체적인 낱말들에 성을 배분하는 규칙이 순전히 우연적이고 관례적이라는데 동의한다.
2 노발리스, <푸른 꽃>,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3
김해민
⟪날지 않는 사람들⟫ 전시 서문, 유영공간, 2023
인상 깊은 말들로부터종종 어딘가 세게 맞은 것같이 강한 말로부터 생각이 번지는 순간들이 있다.
잠시 동안 뇌가 정지된 듯 복잡해지다가 차분히 생각에 생각을 더한다. 주로 잠이 들기 전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이러한 조각들을 전송한다. 그렇게 모아둔 조각들로 출발한 생각은 줄곧 평소에 관심 있게 생각하던 단어들과 함께 버무려질 때가 많다. 이번 전시 또한 그러한 과정 중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물들이다.
하나. 대학시절, 수업을 듣던 중 내게 인상 깊게 남은 피드백이 있었다.
“영현 씨의 그림에선 어딘가 모르게 죄의식이 느껴지는 기분이에요.”
물론 그 당시 완전무결한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 죄를 지을 수 있는 신체기관을 생략하고 코만 남은 형상을 그리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신선하다 못해 어딘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죄의식이라는 건 죄를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인데 나는 그 기준이 상당히 높은 것 같긴 하다. 하여 그게 삶에서 나를 피곤하게 한다. 창작은 자유라지만 나는 그것에서도 딱히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만든 창작물이 나를 드러낸다는 생각 때문인 것이겠지. 그런 이유로 그림 뒤에 숨어 남은 형상에 대해서만 떠들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을 한다.
천사는 인간도 신도 아닌 중간 존재로 흔히 인간의 형상에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겉보기에 인간과 다른 딱 한 가지, 날개 덕에 그들은 인간의 잣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날개는 면죄부와 비슷한 가. 그러나 날개 때문에 그들의 행위에는 천사에게 씌워진 프레임이 작동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점은 나와 그림의 관계와 유사하다.
둘. 처음으로 어느 갤러리와 미팅을 했던 작년 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는 받은 질문들에 하나같이 바보 같았다. 그중 가장 후회가 남는 질문 하나가 뇌리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여태껏 어떤 작업을 할 지만 생각해 봤을 뿐 어떤 작가가 되겠다는 말은 너무 거대한 포부처럼 느껴져 피했을지도 모른다. 아무 말을 지껄인 후 집에 가는 내내 자신 없는 스스로가 창피했다.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 볼 질문이겠지만 처음으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현재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하나 정했다.
나와 나의 작업의 모습이 마치 단편소설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허구의 것을 마치 있음 직하게 그려내고 진짜 있음 직하지만 허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창작의 자유를 얻는다. 또한 작가는 스토리의 의도를 책에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꽤 있어 보이는 방패와 적당한 책임 전가, 그러면서도 소재가 일관될 필요 없는 단편이자 크게 보면 각각의 이야기가 또다시 작가의 스타일로 묶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소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있음 직하지만 허구의 것이고 허구이지만 있음 직함’은 나의 그림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는 내가 중세 시대 종교화에서 자주 모티브를 얻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렸기에 생기는 왜곡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간접적으로 보고 따라 그릴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나는 최대한 예전 종교화를 그리던 방식을 따르려 노력한다. 최소한의 자료는 나를 모델로 사진을 찍어 도움을 받고 그 이외의 것은 최대한 보지 않고 머리와 손으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어딘가 어색함이 많지만 그 어색함이 주는 주관적 느낌이 왠지 정직한 상상 같아 좋다.
셋. <Sleeping Horse> 라는 제목의 그림은 이전의 전시에서 전시했던 작품이다. 그 그림에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자고 있는 말이 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의 생사 여부를 궁금해했다. 나는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 말은 자고 있던 것이에요.”라고 말했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건 순전히 내 추측이었다. 주변 누구도 그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당연히 죽은 것은 아니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내가 직접 사실을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나 혼자 그 말의 이미지에 감명받아 작품까지 만들었으니 경솔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나는 숨 쉬듯 지레 판단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 사실이라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는 것 중 진실보다는 익숙함에 가까운 것이 많다는 걸 잊고 산다. 나의 그림에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대상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들의 상징성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또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알고 있던 상징적 의미와 보이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불편함을 유발하지 않을지 생각한다. 아마 어딘가 편치 않은 감정은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중에 고착되어 익숙해진 관념들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그림이 없는 책은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니 상상력을 키우게 된다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본 적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반대로 텍스트 없는 이미지는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내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상된, 각자의 관념이 가득 담긴 서사가 듣고 싶다.
김영현
⟪불안한 선⟫기획노트, ABMS, 2022
그림은 자신이 멈춰있더라도, 감상자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좌대를 만들고 싶었다. 감상자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동선을 가진 4면 좌대를 제작하였다. 그림을 놓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이 좌대는 현재까지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나는 쉽사리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결국 순서가 뒤집혔다. 하지만 나는 이 좌대에 놓일 그림을 찾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정말 어려웠지만, 언젠가 4개의 면이 꽉 차 있는 좌대를 상상한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한다. ‘빈 좌대는 채워져야 한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삼각형의 도자기들을 크기순으로 좌대에 올려놓았다. 우선은 그것이 좌대를 기능하게 하는 최선이었다. (김아주의 작업노트 中)
임시방편으로 채웠다는 좌대는 누가 봐도 실패하지 않아 보인다.
김아주의 작업은 보는 이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고 여기저기로 관객들을 이동시키며 혼을 빼놓고 내보낸다.
최고의 공격은 방어라고 하듯 김아주의 작업은 읽을 수 없는 제목과 철저하게 계획된 듯한 그의 공간에서 어딘 가 모르는 강한 방어기제가 느껴진다.
그 속에서 보여지는 강한 결핍은 김영현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는 얇은 천에 빼곡히 담은 그림을 고정하지 않은 채 제시하는 방법을 선택해 조금 더 공격적이게 환상을 부각시키기도 혹은 그 착각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연약한 천이 어딘가에 안전하게 정착하기를 바라는 듯한 결핍이 동시에 느껴진다. 겉보기에 강렬한 것들이 실은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가 강한 것처럼. 이렇듯 방어의 힘이 강한 두 작업이 어우러진다면 그 결핍이 비소로 진짜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채워지길 바라는 좌대와 정착하길 바라는 그림, 그들의 결핍이 조화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제시되길 희망한다.
김영현
⟪졸업전시⟫ 작업노트, 2021
#낭만과 공포
어제의 낭만은 오늘의 공포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낭만적인 것은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공포일 수 있다.
묘하게 어울리는 두 단어는 미세한 한 끗 차이에서 벌어져 되돌릴 수 없게 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흔히 낭만적인 풍경에서 자주 보이는 소재들로 공포를 조성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무에 피어오르는 이끼들을 다소 징그럽게 그려보는 사소한 장난부터 시작해 본다.
아니면 약간 꺼림칙한 상상이 되는 번호들도 좋겠다. 조금더 대놓고 장난을 쳐볼까. 지나치게 예쁜 빨간 꽃 하나를 따와 크게 부풀려 본다. 새하얀 눈 밭 위라면 더 좋겠다. 그렇게 낭만적인 소재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정에 점점 주목한다.
#Nothing Happened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 아래에선 이상하게도 이기적인 자유함을 느낀다. 불풀려진 낭만, 지나친 아름다움, 기분 좋지 않은 시선, 블편함을 잔뜩 제공해도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으니 말이다. 꽤나 폭력적인 말이다.
김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