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노트, 2025
본 적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성실히 그려낸 그림들에서 흥미를 느꼈다. 대부분의 종교화나 신화를 그려낸 그림들이 그러했다.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치 경험한 것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허투루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믿게 하기 위해서 있음 직한 환영은 필수적이다. 그렇게 성실히 묘사해 낸 그림들에서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동시에 느낀다.
언젠가 어떤 경험에 의해 내가 믿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무의식중에 학습된 것일 수 있음을 자각한 뒤로부터 더욱더 열심히 현실에 의하지 않은,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공격받지도 않는 나만의 상상 혹은 공상 어쩌면 망상의 세계를 창조해 관찰하고 있다. 현실로부터 시작된 감각들이 최대한 그 시작점에서 멀어지려 애쓴다. 그러나 또 너무 멀어져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곳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완결된 환영의 몰입을 방해한다. 방해하지 않으면 그려진 이미지 속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들 독자적으로 서사를 만들어버릴 것만 같다. 서사의 요소를 갖춰놓고 서사가 없다고 말하며 그 공백으로 생기는 불안함을 아름다움으로 감추기 위해 고심한다. 최대한 예민하고 섬세하게- 필요하다면- 의미 없는 장식,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 부드럽고 연약한 감각을 모두 동원한다.
뭐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겠다.
차분히 완성한 그림을 가만두지 못할 때가 있다. 네모난 화면 속 이미지로만 승부 보기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고 완전무결한 척하는 허구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다. 그게 강하게 작동될 때면 그림이 스며든 천을 풀어 헤치거나 구김을 주거나 빳빳한 판넬에서 흘러나온 천을 감추고 싶지가 않아진다. 수채물감은 아무리 여러 번 칠해도 그 얇기가 유지된다. 얇아도 깊이가 생긴 안정감 있는 화면은 그렇게 천의 구김에 따라 같이 구겨지고 흘러내리고 그러다 실오라기와 함께 해체되며 보잘것없는 천의 연약함에 무너진다. 지젝(Slavoj Žižek)의 말에 의하면 환상은 거짓이 아니라 현실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조이며,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통해 유지된다고 한다. 현실에 의하지 않고 싶어 애썼던 나의 환상은 사실 그 현실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였다는 것이 내가 매끈한 거짓을 건드리며 느낀 안도감이었을까. 나와 그림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그럴듯한 추측으로 가까워지고 또 멀어진다.
김영현
Artist’s Statement, 2025
I’ve always been fascinated by paintings that depict things the artist has never seen, yet render them with such sincerity that they feel real. This is especially true of religious or mythological imagery—paintings based on stories handed down over generations, painted as if experienced firsthand. To make others believe, the illusion must be plausible. In such works, I find both beauty and strangeness at once.
Ever since I had an experience that made me realize the things I believe and "know" might have been unconsciously learned rather than consciously chosen, I’ve become more devoted to creating and observing a world of pure imagination—one that isn’t rooted in reality, one that harms no one and is immune to harm. I try to push the sensations born from reality as far from their source as possible. Still, I don’t want to go so far that I lose control. So I resist full immersion into complete illusion. If I don’t, the visible elements within the image might start building their own narrative. I lay out the elements of a narrative, but insist that there is no story—then wrestle with the anxiety of that emptiness by trying to mask it with beauty. Deliberately, sensitively—sometimes even excessively—I employ meaningless ornaments, delicate and fragile sensations, things considered beautiful.
I don’t really know what it’s all for.
Sometimes, I can’t leave a finished painting alone. Maybe it’s fear—fear of relying only on the image within the neat rectangle. Or maybe it’s a resistance to the fiction pretending to be flawless. When that urge becomes strong, I feel the need to untie or crumple the fabric the painting has seeped into. I no longer want to hide the fabric leaking out from the rigid panel. Watercolor, no matter how many layers are applied, stays thin. That delicate thinness, even when it gains depth, is still easily folded, dragged, and eventually undone. As it collapses into the fragility of the cloth, threadbare and broken, so too does the illusion.
According to Slavoj Žižek, fantasy is not a lie, but a structure that enables reality, and ideology sustains itself through fantasy. So perhaps the fantasy I so desperately tried to detach from reality was, in fact, essential to sustaining it. Maybe the relief I felt when disturbing the polished fiction came from that realization. Me and my painting—we endlessly move closer and drift apart through these convincing suspicions.
younghyun
⟪선잠 Seonjam⟫ 전시 서문, 김리아갤러리, 2025
사일런트 듀엣
Silent Duet
“전화가 계속해서 울린다. 마침내 손이 수화기를 들 때, 전화는 계속 울린다.”¹
1930년대 뉴욕의 한 아편굴 깊숙한 곳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아편굴에는 한 남자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지속되는 벨소리에도 그는 응답하지 않는다. 화면은 비 오는 길가의 가로등으로,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경찰들의 모습으로, 금주법 시대의 끝을 축하하는 광경으로 서서히, 그러나 갑작스럽게 전환된다. 와중에 벨소리는 꾸준히 이어져 관객을 신경질이 날 정도에 이르게 한다. 전화벨이 스무 번쯤 울렸을 때, 결국 어떤 손이 등장해 수화기를 든다. (그럼에도) 전화는 계속 울린다.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 도입부의 이 기념비적인 장면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 번째 소리는 “현실”에 속한다. 반면에 수화기를 든 이후에도 계속되는 전화벨 소리는 지정되지 않은 실재의 공백에서 나온다.”² 영화의 벨소리는 이처럼 오로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가 아니다. 그것은—자그마치 3분이나 이어지는 이 미칠듯한 벨소리는—아편의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깨워 현실의 필연성을 깨우치게 한다. 아편의 환상, 그러니까 꿈으로부터 깨어나 현실로 넘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꿈이 현실보다 더 실재적이고, 더 외상적이고, 더 충격적인 경우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해당한다. 그러나 환상으로부터 도피한 현실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할 일들을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깨어남은 계속해서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즉 우리는 실재적인 악몽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더 큰 실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김영현은 그간 “상징적 허구들의 근본적인 역설”³을 통해 자신의 작업 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뤄왔다. 그에게 상징적 질서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언어의 세계, 실재의 혼돈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인 동시에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관성의 일종으로서 아무런 의심 없이 현실에 접근하려는 주체의 순진한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서사나 현상에 관해 작가는 이들이 사후적으로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주시하며, 비록 그 또한 사후적일지라도 정립의 과정에서 자신이 상실한 것을 자각하고자 분투한다. 이를 위해 그가 채택한 전략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허구적 환영을 창조하고 그 환영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함정은 환영이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데 있다. 따라서 환영의 깨어짐은 현실의 붕괴를 동반하며, 이러한 동반적 붕괴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불가분성을 제시하는 일이 김영현의 작업에서는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2021년에서 2023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회화는 상징화에 대한 전념, 그리고 그 전념이 실패에 이르는 지점에서 실재를 역으로 드러내는 일에 열중했다. 초원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말, 붉은색 곱슬머리를 한 천사들의 군상, 붉은 말 위에 엎드린 흰 날개의 천사 등 작가는 특정 도상을 화면 위에 등장시켰는데, 이는 주로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를 통틀어 중요하고도 복합적인 상징으로 기능해 온 것들이었다. 이처럼 미술사적으로 고착화된 의미는, 불분명할지언정 각 작품이 어떠한 서사를 함축하고 있으리라는 기대, 심지어 작품과 작품을 연속적으로 매개하는 논리구조가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서사가 있는 듯한 연출에 서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되물으며, 자신이 주로 활용하는 종교적, 신화적 도상들의 궁극적 무정형성을 폭로했다. “결코 보이지 않는 살이며, 사물들의 토대”⁴인 무정형성은 회화를 자세히 보아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서투른 원근처리와 왜곡된 신체비율, 묘사된 인물들의 인형 같고도 기계적으로 조립된 듯한 표정과 자세를 통해 의도적으로 유출되었다. 마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표현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본 적 없는 대상을 마치 본 것처럼 그리는 행위와 무엇인가를 믿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발명하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⁵
김영현의 회화에서 2024년부터 두드러지는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추상으로의 전환과 물리적 지지체에 관한 실험을 들 수 있다. 먼저 관념적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관념적 대상을 관념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일부 전환되는데, 이는 기존에 대상에게 부여되던 자의적인 서사마저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림의 확대된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검고 흰 덩어리나 자연에 내재한 피보나치의 수열을 연상시키는 유기적 패턴들은 그 자체로는 여전히 하나의 상징이지만 더 이상 사물을 대체하는 언어로서 기능할 수 없으므로, 의미에 의해 채워질 수 없는 틈새를 열어젖힌다. 한편, 이 시기부터 작가는 그림이 스며든 광목의 실을 풀거나, 이를 판넬로부터 분리해 길게 늘어뜨리고 구김을 주는 등 지지체의 연약함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프레임을 벗어난 천은 상징적 질서의 내부로 포섭될 수 없는 과잉된 기표이자 실재적인 것을 추방하여 성취된 회화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해당 개념의 환영적 지위를 환기시키는 장치가 된다.
전시 ≪선잠≫에서 김영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지적 실험과 회화적 실험을 토대로 초감각적이고 본체론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환영을 겨냥한다. 재현의 커튼 뒤에 은폐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현실의 실체가 도리어 은폐적 제스처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작가의 회화를 촉진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커튼을 걷으려고 하기보다 커튼을 이중으로 설치하는 방식을 통해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음’의 상태를 조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쯤 열린 창문의 틈새를 통해 실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정도의 회화가 아닌, 그 전부가 환영이자 현실이며 환영과 현실이 서로를 공격하는 회화를 구축한다. 전시와 동명인 <선잠>(2025)을 비롯해 <두 사람>(2025), <세 개의 발>(2025), <창백한 허물>(2025) 등의 작업에 등장하는 낯익은, 그러나 작가의 상상으로 꾸며낸 존재자들은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되는 현실과 이미 근접해있는 실재 사이의 긴장을 형상화하듯 불안정한 구도와 기이한 디테일을 특징으로 삼는다. 관객을 이들을 시각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으나, 그래서 결국 이들이 무엇인지는 쉽게 정의내리지 못한다. 한편, <무희>(2025), <더미>(2025), <3-1>과 <4-1>(2025) 같이 최소화된 조형적 얼개로 인해 모호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은 실재에 과도하게 밀착함으로서 오히려 현실성(reality) 자체가 사라진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적 풍경을 예시한다. 이처럼 김영현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직관적 대상의 보유 여부가 현실과 환영을 가르는 경계가 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화면 안에는 그려짐으로 인해 현실화된 대상이 징후로서 기입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판단을 넘어선 공허한 말이며 모든 서사를 농담화하는 한낱 형식, 우연을 가장한 필연성의 외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서술들을 모두 포함하는 적대적 실재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벨소리가 있다. 이 벨소리는 환상과 현실이 구분 불가능함을 밝히고 둘을 하나로 잇는 청각적 텍스처로서 기능한다. 반면 김영현의 회화에는 벨소리와 같은 외적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했더라면 이는 프레임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굴절하여 안으로 수렴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회화에는 스스로를 영원히 외래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각적 모티프 및 이들의 연결과 반향이 있다. 우리가 이를 신비주의의 한 양상이라고 확신할 때쯤, 회화는 자신의 신체-장막에 상처를 내어 그것이 연출된 환영임을 물질의 궁극적 근거로서 반박한다. 따라서 작가가 여태 보지 못한 이미지들과 한 번도 표현된 적 없는 심상을 그린다고 할 때, 이는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들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이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믿음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작가는 기꺼이 속기 위해 그리기로 한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이 믿고 있는 모든 진실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여기서 또 다른 질문.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의 한 형태가 우리가 매일 꾸는 악몽이라면, 믿지 않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¹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서울: 도서출판 b, 2023), 203.
² 같은 곳.
³ 같은 문단에서 뒤이어 설명하듯, 상징적 허구들의 근본적인 역설이란 허구가 현실의 상실을 초래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에 대한 유일한 접근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같은 책, 176.
⁴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2, ed. Mill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159, 같은 책, 229에서 재인용.
⁵ 공교롭게도 지젝은 2025년 1월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의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깊이감의 상실을 지적한다. 극도로 사실적인 재현이 중시되는 시대에 다소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원근법적 표현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라파엘 전파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김영현의 작업은 동시대 회화에 속하지만, 구도와 색채, 모티프를 포함한 많은 부분에서 고전주의 회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그것이 단순한 참조점인지 아니면 진정한 회귀를 목적으로 삼는지는 다투어볼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하나의 화폭 내에서 이질적 시간성이 발생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Slavoj Žižek, “David Lynch as a Pre-Raphaelite”, e-flux notes (January 2025), accessed July 9, 2025, https://www.e-flux.com/notes/650324/david-lynch-as-a-pre-raphaelite.
임현영
작업노트, 2024
✥
무겁게 피어오르는 연기,
날카로운 깃털,
가시 돋친 매끈한 나무,
날지 않는 천사들.
어제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 그 어떤 것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온 날이 있다. 언젠가부터 지나치게 평화 로운 것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모를 위태로움이 느껴지곤 했다. 이제껏 자연스레 상상했던 장면들이 실은 무 의식중에 학습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러한 예민함은 나의 작업 전반에 흐르는 일관된 감각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 한순간에 뒤바뀔 때에 위반의 매력을 느낀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굳어진 것에 가느다란 금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금은 은연중에 불안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깨져버린 화병이 아닌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금이 간 화병처럼 위태로운 가능성을 머금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고자 한다. 위반과 모순의 알레고리로서 나는 자주 ‘천사’나 ‘말’과 같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강한 재료들을 빌려왔다. 그들의 껍데기는 내 허구의 세상에서 정해진 레시피 없이 빚어진다. 예컨대 천사는 ‘선’의 상징으로 흔히 인간의 형상에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그 날개가 그들을 인간의 잣대에서 벗어나게 하기도 갇히게 만들기도 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점은 내가 상징의 소재를 가져와 흉내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런 유희들이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물과 호분(조개껍질 가루로 만든 전통안료)을 사용해 물감의 농도와 채도를 조절하여 얇은 광목천에 부드럽게 스미는 기법은 아무리 여러 번 겹쳐 올려도 그 두께가 유지된다. 그렇게 만든 안정감있는 환영은 때때로 구겨지고 흘러내리고 그러다 실오라기기와 함께 해체되며 보잘것 없는 천의 연약함에 무너진다. 어쩌면 그러한 물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한껏 몰입시켜 놓은 평평한 환상에 위태로운 입체감을 보태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그림들에선 더욱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부단히 존재하게 한다. 본 적 없는 것을 본 것처럼 그려내거나 사물의 본래의 속성에 반하게 표현하는 모순적인 행위에서 나는 창조자의 놀음과도 같은 쾌감을 느낀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공간 속에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대상을 묘사하며, 관념적인 표현과 현실적인 표현이 한데 뒤섞으니 점점 더 묘한 기시감이 생긴다. 미시감과 기시감의 사이, 쾌와 불쾌의 사이, 낭만과 공포의 사이.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그러니 오히려 누구보다 가까운, 그러나 한 끗 차이로 갈라져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그 간극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내가 만든 세계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
김영현
Artist’s Statement, 2024
✥Heavy smoke rising slowly,
sharp feathers,
smooth yet thorn-covered trees,
angels that do not fly.
There are days when something I once found beautiful suddenly strikes me with an overwhelming sense of dread. At some point, I began to feel an unsettling tension in images that appeared excessively peaceful. I have experienced moments of realizing that the scenes I had naturally imagined were, in fact, unconsciously learned. These realizations deeply affected me, and this heightened sensitivity has become a consistent undercurrent in my work.
I am drawn to the allure of transgression when something long regarded as romantic and beautiful is abruptly inverted. This is why I seek to create subtle fractures in the things that have become tacitly accepted and solidified over time. A crack, however fine, carries with it an unspoken anxiety. Rather than depicting a vase that has already shattered, I aim to capture the fragile beauty of a vase on the verge of breaking—holding within it a precarious possibility.
As allegories of transgression and contradiction, I often borrow imagery with strong symbolic associations, such as angels or horses. Stripped of their original context, these figures are reshaped in my fictional world without a predetermined formula. For instance, angels have long been depicted as symbols of virtue—humanoid figures adorned with wings. Yet, those very wings both liberate them from human constraints and simultaneously confine them. The contradiction of wings symbolizing "freedom" while failing to be truly "free" is precisely why I engage with symbolic motifs, imitating them while questioning their inherent meanings.
At the same time, I am careful to remind myself and the viewer that these representations are mere illusions—that this world I construct does not truly exist. Using water and hobun (a traditional white pigment made from crushed seashells), I control the density and saturation of the paint, allowing delicate layers to softly seep into thin muslin fabric. No matter how many times the pigment is overlaid, the material retains its translucency, creating an illusion of stability. Yet, over time, these carefully constructed images wrinkle, sag, and unravel, dissolving into fragile threads—collapsing under the weight of the fabric’s own vulnerability. Perhaps revealing this materiality in its entirety adds a precarious dimensionality to the otherwise immersive flat illusion.
In my recent works, I am even more invested in persistently making the impossible exist. I attempt to paint things I have never seen as if I have seen them or depict objects in direct opposition to their inherent nature. This paradoxical act grants me a sense of creative play, akin to that of a maker toying with their creation. Situated in a timeless space—neither past nor future—I observe my subjects at the closest possible range, blurring the boundaries between conceptual and realistic representation. As a result, a peculiar sense of déjà vu intensifies.
Between the familiar and the unfamiliar, between pleasure and discomfort, between romance and fear—these opposing forces seem to lean against each other, simultaneously the closest of kin and yet separated by the thinnest of boundaries. I remain attuned to these subtle gaps, obsessively observing the world I have created.
그다음은 꽃들의 차례였다.
…
장미는 그들의 꺼지지 않은 불꽃 같은 입,
육신의 화염으로 변치 않는 대리석 위를 핥으며
와인 같은 붉은 얼룩과 핏빛의 자주색 얼룩을
길고 순수한 기둥 꼭대기까지 튀겼다.
(Le Mortis, Contes et Nouvelles (1900)/ Rachilde)
역사, 이성, 도시를 침략해오는 맹렬한 불꽃. 죽음을 암시하는 한여름의 열화상을 그리는 관능적인 상징들의 나열, 라실드의 문장들은 전체를 이루는 감각의 심포니로서 기능한다. 낡은 것을 죽음으로 여기고 오직 새로운 발견으로 예술을 탐하기, 포섭되지 않은 언어(hapax)와 관습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하는 방식을 고집했던 19세기 말의 퇴폐 예술 사조 데카당스(Décadence)는 완성과 절정에 도달한 문화의 나른한 아름다움으로 일컬어진다.
‘Rachilde’라는 필명으로 성적으로 와해된, 온갖 스캔들적인 작품들을 쏟아낸 작가 Maguerite Eymery (1860-1953). 희귀한 것들에 민감하고 편집증적이며 온갖 유혹, 불안을 다루는 데카당스 문학 기류와 다의성, 종합의 미학인 상징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시 문학, 희곡, 소설 장르를 혼합시킨 극-산문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라실드의 텍스트는 모든 것을 표현하도록 촉구된 듯이 극도로 과장되어 있고 생명성과 죽음의 경계, 성적 구분1이 모호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대리석을 핥는 장미⟫는 비좁은 공간 안에 둘 이상의 상징이 어지럽게 뒤얽혀 추는 춤, 동시에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종말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의 표상이다. 접합할 수 없는 시간의 거리에서 다시금 이 매혹적인 말의 놀이(jeux d’écriture)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불멸의 합리성과 이성의 표면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더럽히는 우리들만의 은밀한 놀이이며, 어쩌면 지금에 있어 유일한 대항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감추는 자들과 알려고 하는 자들의 숨바꼭질
숨바꼭질 같은 상징과 재현의 무대에서 불리한 쪽은 언제나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아)보려는 자, 우리다.
전시라는 사건(scene)에서 진실의 키를 쥐고 있는 영현과 정민의 작업은 매체의 휘장 사이를 오가며 결코 자신을 전부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듯하다. 영현의 캔버스는 단단한 프레임을 벗고 하나의 막/망처럼 걸려있고, 이들이 드리운 이미지는 두껍고 단단한 사전에서 찢겨 나온 종잇장에 남겨진 아리송한 단어와 상징들의 단편 같다. 이처럼 작가는 상징, 허구, 상상, 재현을 뒤섞고 혼합하는 방식으로 미끄러지거나 찢겨 나온 욕망을 가시화한다.
정민의 손을 거친 유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신비한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거칠게 풍화되어 있거나 때로는 묵직하고, 속을 감추는 희뿌연 표면을 띠는 등 유약하고 투명한 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있다. 이 유리 조각들은 먼발치에서 오류를 범하는 시각 체계를 자극하고는 지켜보고, 희롱하면서 본질을 숨긴 채 각자 연극 속 역할을 연기한다. 정민은 그럼으로써 하나의 가시성이 의미를 획득하는 세계의 작동 방식에 의문을 부치고 추상과 장식, 빈 공간(void)과 조각의 관계성이 빚어내는 경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가 지닌 전복성을 실험한다.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감추거나 속이는 일은 분명 정치적이다. 속이기는 권력의 이동과 유지, 쟁탈이 이루어지는 전투의 장이고 때론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도 환영적인 결핍과 욕망을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반복적이고 수렴적인 내적 논리를 띤다. 무엇보다 거짓의 극(drama)적 전략은 쾌락을 동반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쪽이나 그 작동을 파헤치려는 쪽은 모두 진리의 선취라는 목적 아래 신기루 같은 쾌감을 느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비어있는 실재를 지시하고 은유(대체)하려는 무한한 시도와 실패를 담지한 언어, 재현의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시각장 안에서 이러한 거짓의 플레이는 무엇보다도 예상을 무너뜨리려는 충동적이고 전복적인 의지와 관련되며, 속이기는 또한 제 3의 위태로운 존재 방식을 탐색하는 일, 의미의 제공과 교환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유보적인 태도로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끝없는 실랑이 속 우리가 패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술래의 역할을 져버리는 것뿐이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그것 자체에 감응하며 함께 숨죽이기. 속이고 속아 넘어갈 때의 ‘나’는 ‘눈먼 나’이며, 이때 주체는 해방적 상상력을 잠시 엿본다.
어두운 한 낮의 꿈 A daydream in the dark
낭만주의 소설 <푸른 꽃>2에서 경계적인 시공간 어스름 녘은 ‘낮의 빛과 밤의 어둠이 부딪히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때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만 목격할 수 있는 속임수가 존재’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영현의 화폭은 이처럼 빛과 어둠, 죽음과 생명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경계 공간(liminal space)으로 설정되었다. 작가의 회화에서 실제 정물 혹은 풍경으로 보이는 도상들, 예컨대 말, 깃털, 숲, 구름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를 둔 상상의 재구성, 즉 관념적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깃털’들은 실제 물성을 지닌다기보다 어떤 완전한 이데아적인 깃털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작가가 조작을 가해 왜곡된 빛과 밀도, 물체의 전도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표현한 회화는 무의식의 탐구, 추상화(abstraction)를 거친 파편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작가는 전작에서 생과 사, 인간과 천상의 중간자인 ‘천사’와 역사적으로 힘, 자긍심, 아름다움을 함의하는 도상인 ‘말’ 등 구체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선과 악의 알레고리, 자연의 숭고화를 비롯해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서사를 떠받치기 위해 사용해 온 프레임의 오래된 관습을 흉내 내고(mimic), 폭로하면서 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유령같이 희미한 형체를 띤 몸들과 그 사이에서 비쭉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가시, 붉은 육체들 또한 욕망의 자연화와 저속함의 얄팍한 경계를 말한다. 이들이 과감하게 차지하는 화면 구성에 더해 초감각적인 확대, 비약과 의뭉스러운 상징들은 인상주의를 넘어 추상에 가닿았던 ‘나비파(Les Nabis)’의 미묘한 색채를 닮은, 섬세하고 미끈한 수채화로 제시되면서 감각의 착란을 가중한다. 작가는 이처럼 비어있는 회화적 기호의 허상을 폭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무한히 유보하면서, 실재와 재현, 믿음과 허구가 공존하는 상징적 체제 안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Entre-deux ; between two (things)
감각의 비논리적 충돌은 또한 단단함과 유약함, 작고 정밀한 터치와 구조적인 지지물이 함께 제시되는 정민의 혼성 조각을 이끄는 주된 작동 원리다. 유리는 그 자체로 작은 모래 입자에서 화력과 기술, 노동력을 거쳐 변모하는 다양한 시간화와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정민이 유리를 다루는 방식은 물질에 내재하는 복합적인 성격과 모순적 이미지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분절시키면서, 스스로 무한히 중첩되거나 독립적인 구조를 이루는 하나의 형식적 유희, 즉 미장아빔(mise en abyme)으로서 존재케 하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한편, 작가는 유리 작업에서 주로 선택되는 블로잉 기법에 비해 재료, 시간과 같은 물리적 조건의 절대적인 투입을 요하는 캐스팅 방식을 활용한다. 틀에 천천히 굳힌 유리는 자연스럽게 불투명한 표면을 지니는데, 이 표면을 연마하는 수공예적 노동의 정도에 따라 그 투명도를 달리하게 된다. 유리는 크리스털의 경우에서와 같이 매끈함이나 투명도가 가치의 지표가 되어왔기 때문에, 연마 기술은 미술에서 유리가 공예 재료로서 격하되거나 제한되어온 맥락을 포함하고, 그 구분과 위계의 경계를 와해시키고자 하는 작가가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도구이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체의 대립적 구조를 해체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은 정민의 조각이 지닌 여타 속성들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Cheeeeeeesze>(2021), <you cannot trust a surface>(2023)와 같은 작업은 유리 오브제와 좌대 혹은 지지대가 전체 구조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전시 방식에 따라 결합되거나 부분적으로 제시되면서 어떤 대표성이나 중요도에 있어 위계 없이 존재한다. 하나의 유기물을 구성하는 신체 기관들이 결속되었다가 풀어지고, 제 방식대로 다시 붙고 치환되듯이 혼돈하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병치되는 것이다.
데카당스의 근간인 부정의 동력과 모호한 언어, 문법 규칙을 어지럽히고 다의적 상징을 종합하는 글쓰기 방식을 떠올려보자. 정민의 유리 조각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들의 글쓰기 놀이처럼 구조는 부분으로, 부분은 물질의 독립성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리보충 — 오직 그 자신의 부정으로서만 보이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1 명사에 있어 여성성, 남성성을 부여하는 언어에서 문법적 성은 지칭 대상의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던 상징주의 문학에서 활발히 사용되었으며, 특히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문학 텍스트를 낱말의 성을 통해 분석하는 성 분석(génosanalyse)은 보편적인 방법이다. 한편,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강조했듯이, 거의 모든 언어학자들은 구체적인 낱말들에 성을 배분하는 규칙이 순전히 우연적이고 관례적이라는데 동의한다.
2 노발리스, <푸른 꽃>,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3
김해민
⟪날지 않는 사람들⟫ 전시 서문, 유영공간, 2023
인상 깊은 말들로부터종종 어딘가 세게 맞은 것같이 강한 말로부터 생각이 번지는 순간들이 있다.
잠시 동안 뇌가 정지된 듯 복잡해지다가 차분히 생각에 생각을 더한다. 주로 잠이 들기 전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이러한 조각들을 전송한다. 그렇게 모아둔 조각들로 출발한 생각은 줄곧 평소에 관심 있게 생각하던 단어들과 함께 버무려질 때가 많다. 이번 전시 또한 그러한 과정 중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물들이다.
하나. 대학시절, 수업을 듣던 중 내게 인상 깊게 남은 피드백이 있었다.
“영현 씨의 그림에선 어딘가 모르게 죄의식이 느껴지는 기분이에요.”
물론 그 당시 완전무결한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 죄를 지을 수 있는 신체기관을 생략하고 코만 남은 형상을 그리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신선하다 못해 어딘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죄의식이라는 건 죄를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인데 나는 그 기준이 상당히 높은 것 같긴 하다. 하여 그게 삶에서 나를 피곤하게 한다. 창작은 자유라지만 나는 그것에서도 딱히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만든 창작물이 나를 드러낸다는 생각 때문인 것이겠지. 그런 이유로 그림 뒤에 숨어 남은 형상에 대해서만 떠들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을 한다.
천사는 인간도 신도 아닌 중간 존재로 흔히 인간의 형상에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겉보기에 인간과 다른 딱 한 가지, 날개 덕에 그들은 인간의 잣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날개는 면죄부와 비슷한 가. 그러나 날개 때문에 그들의 행위에는 천사에게 씌워진 프레임이 작동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점은 나와 그림의 관계와 유사하다.
둘. 처음으로 어느 갤러리와 미팅을 했던 작년 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는 받은 질문들에 하나같이 바보 같았다. 그중 가장 후회가 남는 질문 하나가 뇌리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여태껏 어떤 작업을 할 지만 생각해 봤을 뿐 어떤 작가가 되겠다는 말은 너무 거대한 포부처럼 느껴져 피했을지도 모른다. 아무 말을 지껄인 후 집에 가는 내내 자신 없는 스스로가 창피했다.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 볼 질문이겠지만 처음으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현재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하나 정했다.
나와 나의 작업의 모습이 마치 단편소설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은 허구의 것을 마치 있음 직하게 그려내고 진짜 있음 직하지만 허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창작의 자유를 얻는다. 또한 작가는 스토리의 의도를 책에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꽤 있어 보이는 방패와 적당한 책임 전가, 그러면서도 소재가 일관될 필요 없는 단편이자 크게 보면 각각의 이야기가 또다시 작가의 스타일로 묶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소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있음 직하지만 허구의 것이고 허구이지만 있음 직함’은 나의 그림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는 내가 중세 시대 종교화에서 자주 모티브를 얻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이 아닌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렸기에 생기는 왜곡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간접적으로 보고 따라 그릴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나는 최대한 예전 종교화를 그리던 방식을 따르려 노력한다. 최소한의 자료는 나를 모델로 사진을 찍어 도움을 받고 그 이외의 것은 최대한 보지 않고 머리와 손으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어딘가 어색함이 많지만 그 어색함이 주는 주관적 느낌이 왠지 정직한 상상 같아 좋다.
셋. <Sleeping Horse> 라는 제목의 그림은 이전의 전시에서 전시했던 작품이다. 그 그림에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자고 있는 말이 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의 생사 여부를 궁금해했다. 나는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 말은 자고 있던 것이에요.”라고 말했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건 순전히 내 추측이었다. 주변 누구도 그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당연히 죽은 것은 아니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내가 직접 사실을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나 혼자 그 말의 이미지에 감명받아 작품까지 만들었으니 경솔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나는 숨 쉬듯 지레 판단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 사실이라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는 것 중 진실보다는 익숙함에 가까운 것이 많다는 걸 잊고 산다. 나의 그림에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대상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들의 상징성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또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알고 있던 상징적 의미와 보이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불편함을 유발하지 않을지 생각한다. 아마 어딘가 편치 않은 감정은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중에 고착되어 익숙해진 관념들의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그림이 없는 책은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니 상상력을 키우게 된다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본 적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 반대로 텍스트 없는 이미지는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내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상된, 각자의 관념이 가득 담긴 서사가 듣고 싶다.
김영현
⟪불안한 선⟫기획노트, ABMS, 2022
그림은 자신이 멈춰있더라도, 감상자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좌대를 만들고 싶었다. 감상자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동선을 가진 4면 좌대를 제작하였다. 그림을 놓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이 좌대는 현재까지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나는 쉽사리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결국 순서가 뒤집혔다. 하지만 나는 이 좌대에 놓일 그림을 찾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정말 어려웠지만, 언젠가 4개의 면이 꽉 차 있는 좌대를 상상한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한다. ‘빈 좌대는 채워져야 한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삼각형의 도자기들을 크기순으로 좌대에 올려놓았다. 우선은 그것이 좌대를 기능하게 하는 최선이었다. (김아주의 작업노트 中)
임시방편으로 채웠다는 좌대는 누가 봐도 실패하지 않아 보인다.
김아주의 작업은 보는 이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고 여기저기로 관객들을 이동시키며 혼을 빼놓고 내보낸다.
최고의 공격은 방어라고 하듯 김아주의 작업은 읽을 수 없는 제목과 철저하게 계획된 듯한 그의 공간에서 어딘 가 모르는 강한 방어기제가 느껴진다.
그 속에서 보여지는 강한 결핍은 김영현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는 얇은 천에 빼곡히 담은 그림을 고정하지 않은 채 제시하는 방법을 선택해 조금 더 공격적이게 환상을 부각시키기도 혹은 그 착각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연약한 천이 어딘가에 안전하게 정착하기를 바라는 듯한 결핍이 동시에 느껴진다. 겉보기에 강렬한 것들이 실은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가 강한 것처럼. 이렇듯 방어의 힘이 강한 두 작업이 어우러진다면 그 결핍이 비소로 진짜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채워지길 바라는 좌대와 정착하길 바라는 그림, 그들의 결핍이 조화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제시되길 희망한다.
김영현
⟪졸업전시⟫ 작업노트, 2021
#낭만과 공포
어제의 낭만은 오늘의 공포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낭만적인 것은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공포일 수 있다.
묘하게 어울리는 두 단어는 미세한 한 끗 차이에서 벌어져 되돌릴 수 없게 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흔히 낭만적인 풍경에서 자주 보이는 소재들로 공포를 조성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무에 피어오르는 이끼들을 다소 징그럽게 그려보는 사소한 장난부터 시작해 본다.
아니면 약간 꺼림칙한 상상이 되는 번호들도 좋겠다. 조금더 대놓고 장난을 쳐볼까. 지나치게 예쁜 빨간 꽃 하나를 따와 크게 부풀려 본다. 새하얀 눈 밭 위라면 더 좋겠다. 그렇게 낭만적인 소재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정에 점점 주목한다.
#Nothing Happened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 아래에선 이상하게도 이기적인 자유함을 느낀다. 불풀려진 낭만, 지나친 아름다움, 기분 좋지 않은 시선, 블편함을 잔뜩 제공해도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으니 말이다. 꽤나 폭력적인 말이다.
김영현